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클랜시 브라더스 (문단 편집) == 데뷔와 성장, 전성기 == 1956년 네 멤버들은 미국에서 만났다. 모두 공식 직업은 [[영화배우]]. 그러나 이미 패디 클랜시는 그 전 해부터 트래디션 레코드라는 음반 회사의 사장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다이앤 해밀턴이 수집한 곡들을 모은 앨범도 사실 트래디션 레코드에서 나왔다. 제목은 . 1956년 이 네 멤버들은 이라는, 아일랜드 포크 음악 가운데 레벨 송들을 14곡 뽑아 한데 모은 앨범을 발매하게 되는데, 사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재미로 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 이들은 모두 가수가 아닌 영화배우라 아직 공식적으로 그룹 이름도 없었고, 음원 자체의 질도 아주 조잡해서 패디 클랜시의 하모니카 말고는 어떠한 반주 악기도 없었다. 말이 그룹이지 사실상 솔로 가수 4명이었다. 몇몇 트랙에선 다 함께 곡을 불렀지만 그것조차도 박자가 서로 맞지 않는 등, 도무지 팔기 위한 [[앨범]]이라고는 할 수가 없었다. ~~그래 보여도 명실상부한 인디 레이블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영화배우였고 전문 가수가 아니었기 때문. 게다가 틴 휘슬과 드럼을 다룰 수 있는 토미 메이컴은 ~~산업재해~~ 사고로 인해 손을 제대로 쓸 수가 없었으니... 이렇게 네 멤버들의 앨범은 그냥 단순한 취미활동 정도로 끝날 분위기였다. 그리고 세 멤버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영화판으로 복귀하여 드라마, 영화에 출연하는 평범한 연기 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 앨범이 의외로 엄청난 히트를 기록한 것이다. 당시 아일랜드인은 '하얀 흑인' 취급을 받으며 차별과 멸시의 대상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정말 엄청난 히트였다. [[파일:external/clancybrothersandtommymakem.com/01_rising.jpg|width=333]] 클랜시 브라더스 첫 앨범. 3년간 전혀 음악 활동 없이 연기에 집중하던 네 멤버들은 1959년에 본격적으로 앨범을 내기 위해서 다시 뭉쳤다. 물론 이것은 사실 일종의 도박이었는데, 6개월간 음악 활동을 해 보고 시원찮으면 영화판 복귀, 괜찮으면 음악판 데뷔를 하기로 한 것. 참고로 이 때 패디 클랜시는 37세, 톰 클랜시는 35세였다. 이들은 1956년에 나온 ~~조잡하고 허접한~~ 뭔가 부족한 듯한 앨범을 다시 내기로 했다. 곡은 같은 곡을 부르되 녹음을 다시 한 것. 이 앨범은 [[하모니카]] 반주뿐만 아니라 토미 메이컴의 [[틴 휘슬]]과 [[드럼]] 반주는 물론, 세션맨을 동원하긴 했지만 [[기타]]에 심지어 [[하프]] 반주까지 붙였다. 멤버들의 박자도 서로 잘 맞는 아주 괜찮은 앨범이 나온 것. 뿐만 아니라 새 앨범도 냈는데, 이번에는 드링킹 송들을 모아 앨범을 냈다. 역시 기타와 [[밴조]]는 세션맨을 동원했지만, 마지막 한 트랙에서는 리엄 클랜시가 기타를 쳤다. 참고로 이 앨범 표지에는 네 멤버들 뿐만 아니라 세션맨인 잭 키넌도 나오고, 리엄 클랜시는 ~~이후 굳어진 귀요미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수염을 잔뜩 기르고 나와 못 알아볼 수도 있다. [[파일:external/clancybrothersandtommymakem.com/02_come_fill.jpg|width=333]] 클랜시 브라더스 두 번째 앨범. 맨 오른쪽이 리엄 클랜시이다. 이 두 앨범이 큰 성공을 거두자, 네 멤버들은 본격적으로 음악 활동에 뛰어들게 된다. 그러니 사실상 클랜시 브라더스 데뷔는 1956년이 아닌 1959년인 셈. 아직까지 그룹 이름도 없었는데, 클랜시 브라더스란 이름도 이 때 나오게 된다. 1961년 3월, 클랜시 브라더스는 초대형 음반사인 콜롬비아 레코드와 5년 계약을 맺고, 이라는 콜롬비아 레코드 앨범을 내는데, 이 앨범이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다. 그래미 상 후보에 오를 정도로. 흠좀무. 이때부터 클랜시 브라더스의 전성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 해에 클랜시 브라더스는 그룹 이름을 그대로 따서 이라는 앨범을 자기네 레이블인 트래디션 레코드로 출판했는데, 레퍼토리는 앞서 나온 앨범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전자는 [[라이브]], 후자는 [[스튜디오]]란 것이 다르다. 어쨌든 이 두 앨범이 모두 엄청난 히트를 올리면서, 본격적으로 클랜시 브라더스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파일:external/clancybrothersandtommymakem.com/1961_spontaneous.jpg|width=333]] 그래미 상 후보에 오른 클랜시 브라더스 세 번째 앨범. 클랜시 브라더스는 1960년대 엄청난 인기를 누리며 아일랜드 포크 음악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1964년 아일랜드에서 팔린 전체 음반의 3분의 1이 클랜시 브라더스 앨범이다!''' 1964년 패디 클랜시는 모은 돈으로 고향인 캐릭-온-수어에 농장까지 샀을 정도. [youtube(_G06xa-jJMA)] 1967년 무렵, 를 부르고 있는 클랜시 브라더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